이슬처럼 살자 - 황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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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9월 4일 자료 이동
이슬처럼 살자
매일 같이 비를 뿌리며 늦장마가 오는가 싶더니 오늘은 활짝 개었다. 한낮에는 제법 햇살이 따갑지만 아청빛 하늘의 양털구름이 평화롭다. 저녁을 먹고 서재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선들바람이 살갗에 감각을 불어 넣는다. 하나님은 어쩌면 그렇게 한결 같으실까? 허둥대며 힘겹게 넘어온 고비 고비, 계절을 음미해 볼 여유도 없는 인생들에게 살며시 펼쳐 놓으신 가을. 심호흡으로 톡톡히 여문 공기를 세포 구석구석까지 보낸다.
서재에 몇 점의 도자기가 있다. 이천의 은광도요(恩光塗窯) 김익진 선생의 작품으로 수 십 점이 됐었다. 그러나 수국문양의 수반 세트와 사슴 그림이 있는 분청, 청자 매병 등 아끼는 것들은 이사하다가 깨졌고, 다행히 천개의 국화 그림이 있는 분청 항아리와 시를 넣은 백자 만 남은 것이다. 이 탄 선생님이 자신의 시를 꼬불꼬불 그리듯이 쓴 ‘우리 모두 이슬처럼 살자’는 글씨가 오늘따라 더 싱싱한 생명력을 갖고 움직인다.
아침에 풀잎에 맺힌 영롱한 이슬 한 방울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이 시린데, 어떻게 한 생을 이슬처럼 살고 싶어 했는지. 일에 묻혀 답답할 때, 글을 쓰다가 지쳐 눈을 비비며 고개를 들다가 선생님의 맑은 눈동자와 마주치곤 한다. 언제나 작은 가방 하나 한쪽 어깨에 걸치고 머뭇거리며 나타나, 조용히 앉아 남의 얘기를 잘 들어 주셨다. 한 시대를 풍미하던 대가의 체취를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는 것이 오히려 매력이다. 5년여 전에는 새로운 계간지를 내겠다고 밤이 깊도록 찻집에 앉아 열변을 토하더니 작품을 달라고 하셨다. 얼마 후 ‘미네르바’라는 문예지 창간호가 왔다. 신춘문예 당선자들을 중심으로 촉망받는 신예들 작품 속에 내 시가 실려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한번도 거르지 않고 계절이 바뀌면, 속 깊은 사람에게서 우러나오는 미소가 아름다운 여인처럼 미네르바가 찾아왔다.
얼마 전 문단사람을 만났더니 선생님이 쓰러지셨단다. 벌써 두 번째니까 다시 일어나기가 힘들 거라고들 했다. 아, 선생님은 정녕 이슬처럼 살다가 이슬처럼 스러져 가시려는가!
오늘은 바쁜 걸음을 멈추고 선생님께 전화를 해야겠다.
충주 KBS KM 100.3 '시인의 편지' 8월 29일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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