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제일교회 독립운동가 추성렬 속장의 미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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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제일교회 독립운동가 추성렬 속장의 미담
충주제일교회가 충북의 3.1운동사 가운데서 높이 평가 받는 것은 추성렬 속장과 같은 아름다운 믿음의 신앙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충주 읍내에서 잡화상을 경영하던 그는 분주한 생활 가운데에서도 신실한 믿음으로 신앙의 본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역사⋅사회 변동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일제의 식민 지배라는 불의에 의연히 일어서서 민족 앞에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려는 추성렬 속장과 같은 사람이 있었기에 충주제일교회는 3.1운동의 거사에서 우뚝 서게 되었다.
추성렬 속장은 장양헌 전도사가 가지고 내려온 경고문을 교회 안에서 인쇄하는 일을 유석보와 함께 도우며 3.1만세 시위를 준비하였다. 그는 4월 1일 소이면 한천리까지 가서 한내 장날 만세시위를 주도하였으며 이 때 체포되어 6개월 옥고를 치렀다.
옥고를 치르고 나온 후에 아름다운 미담을 남기고 있다. 그에 관한 기록이 장로교 감리교 합동으로 운영되던 『基督申報』, 기사에 두 차례(1922. 5. 31, 1922. 9. 6) 수록되어 있다. 그 기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추성렬 의거(義擧)
“충주읍교회 속장인 추성렬씨는 소요 당시에 어떠한 혐의로 몇 달 철장아래서 생활하였다. 이때 유족에게 약간의 동정금이 있었는데, 씨는 빈한한 생활을 하는 중에서도 이 돈 1푼도 쓰지 않고 저축하였던 바, 목하(目下, 바로 이때) 교회 내에 제반 재정이 궁핍함을 당하여 씨는 이전의 동정금을 저축하였던 40여원을 판출(辦出)하여 본 교회 내에 종이 없음을 한탄하여 4호종 1좌(座)를 단독으로 기부하였고, 종각 건축비는 일반 신자 측의 연금(捐金, 연보, 헌금)을 모집하여 굉장한 종각을 건설하였다더라”(충주)
(『基督申報』, 1922. 5. 31)
∆ 충주읍교회, 추성렬 연종(捐鍾, 종 기부)
“충북 충주읍교회는 설립된 지 10여년이었으나 아직 종이 없어 유감으로 지내던 바, 본 교회 신자 추성렬씨가 연전 만세 사건으로 몇 달 동안 철창아래서 지내던 그 때 교우인 형제들이 도와주는 식비를 저축하였다가 예배당 종을 사서 드렸으므로 일반 신자는 새 종소리를 들을 때마다 추성렬씨의 열성을 찬양한다더라” (忠州)
( 『基督申報』, 1922. 9. 6.)
위의 두 기사에서 다음의 몇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1) 추성렬 속장은 1919년 3.1 만세 운동 사건에 참가하여 옥고를 치렀다.
2) 감옥에 갇혀 옥고를 치르고 있는 동안 충주읍교회 교인들은 그에게 영치금, 위로금을 주면서 형제 사랑을 베풀었다.
3) 추성렬은 그 위로금, 격려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 두었다가, 모아진 성금 40원을 몽땅 예배당의 커다란 종을 사는데 단독으로 다시 바쳤다.
4) 그 종은 충주제일교회 최초의 종이었다.
이상을 보면, 추성렬 속장이 헌납한 종은 크기가 4호종으로 큰 종이었고, 그 종은 충주읍교회 최초의 종이었다. 교인들은 물론 불신자들까지도 교회 종소리를 들을 때 마다 예배시간만 아니라 추성렬 속장의 옥중 투쟁을 지원했던 충주읍교회 교인들의 따뜻한 사랑 나눔과 애국정신을 함께 생각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추성렬 속장이 헌납한 애국종은 일제말기 정춘수 감독에 의해 지시된 교회 철문과 교회 종 강제 공출 명령에 의해 강제로 빼앗겨, 더 이상 시간과 애국정신을 일깨워주는 종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참으로 뼈아픈 과거라 아니할 수 없다.
그렇지만 추성렬 속장이 헌납한 충주읍교회 애국종 소리는 일제 강점기 시련가운데 있는 충주 시민들에게 위로와 새로운 힘이 되어주었으며, 이런 그의 ‘드리고 바치는’ 신앙적 미담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하나님 사랑, 교회사랑, 이웃사랑, 민족 사랑의 아름다운 신앙적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이다.
충주제일교회가 충북의 3.1운동사 가운데서 높이 평가 받는 것은 추성렬 속장과 같은 아름다운 믿음의 신앙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충주 읍내에서 잡화상을 경영하던 그는 분주한 생활 가운데에서도 신실한 믿음으로 신앙의 본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역사⋅사회 변동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일제의 식민 지배라는 불의에 의연히 일어서서 민족 앞에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려는 추성렬 속장과 같은 사람이 있었기에 충주제일교회는 3.1운동의 거사에서 우뚝 서게 되었다.
추성렬 속장은 장양헌 전도사가 가지고 내려온 경고문을 교회 안에서 인쇄하는 일을 유석보와 함께 도우며 3.1만세 시위를 준비하였다. 그는 4월 1일 소이면 한천리까지 가서 한내 장날 만세시위를 주도하였으며 이 때 체포되어 6개월 옥고를 치렀다.
옥고를 치르고 나온 후에 아름다운 미담을 남기고 있다. 그에 관한 기록이 장로교 감리교 합동으로 운영되던 『基督申報』, 기사에 두 차례(1922. 5. 31, 1922. 9. 6) 수록되어 있다. 그 기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추성렬 의거(義擧)
“충주읍교회 속장인 추성렬씨는 소요 당시에 어떠한 혐의로 몇 달 철장아래서 생활하였다. 이때 유족에게 약간의 동정금이 있었는데, 씨는 빈한한 생활을 하는 중에서도 이 돈 1푼도 쓰지 않고 저축하였던 바, 목하(目下, 바로 이때) 교회 내에 제반 재정이 궁핍함을 당하여 씨는 이전의 동정금을 저축하였던 40여원을 판출(辦出)하여 본 교회 내에 종이 없음을 한탄하여 4호종 1좌(座)를 단독으로 기부하였고, 종각 건축비는 일반 신자 측의 연금(捐金, 연보, 헌금)을 모집하여 굉장한 종각을 건설하였다더라”(충주)
(『基督申報』, 1922. 5. 31)
∆ 충주읍교회, 추성렬 연종(捐鍾, 종 기부)
“충북 충주읍교회는 설립된 지 10여년이었으나 아직 종이 없어 유감으로 지내던 바, 본 교회 신자 추성렬씨가 연전 만세 사건으로 몇 달 동안 철창아래서 지내던 그 때 교우인 형제들이 도와주는 식비를 저축하였다가 예배당 종을 사서 드렸으므로 일반 신자는 새 종소리를 들을 때마다 추성렬씨의 열성을 찬양한다더라” (忠州)
( 『基督申報』, 1922. 9. 6.)
위의 두 기사에서 다음의 몇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1) 추성렬 속장은 1919년 3.1 만세 운동 사건에 참가하여 옥고를 치렀다.
2) 감옥에 갇혀 옥고를 치르고 있는 동안 충주읍교회 교인들은 그에게 영치금, 위로금을 주면서 형제 사랑을 베풀었다.
3) 추성렬은 그 위로금, 격려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 두었다가, 모아진 성금 40원을 몽땅 예배당의 커다란 종을 사는데 단독으로 다시 바쳤다.
4) 그 종은 충주제일교회 최초의 종이었다.
이상을 보면, 추성렬 속장이 헌납한 종은 크기가 4호종으로 큰 종이었고, 그 종은 충주읍교회 최초의 종이었다. 교인들은 물론 불신자들까지도 교회 종소리를 들을 때 마다 예배시간만 아니라 추성렬 속장의 옥중 투쟁을 지원했던 충주읍교회 교인들의 따뜻한 사랑 나눔과 애국정신을 함께 생각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추성렬 속장이 헌납한 애국종은 일제말기 정춘수 감독에 의해 지시된 교회 철문과 교회 종 강제 공출 명령에 의해 강제로 빼앗겨, 더 이상 시간과 애국정신을 일깨워주는 종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참으로 뼈아픈 과거라 아니할 수 없다.
그렇지만 추성렬 속장이 헌납한 충주읍교회 애국종 소리는 일제 강점기 시련가운데 있는 충주 시민들에게 위로와 새로운 힘이 되어주었으며, 이런 그의 ‘드리고 바치는’ 신앙적 미담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하나님 사랑, 교회사랑, 이웃사랑, 민족 사랑의 아름다운 신앙적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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